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상호 간에 원인과 결과를 제공했다.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
어떻게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고.
그런데 임오군란으로부터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오만해진 청나라는 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던 전통적 조공관계를 뒤집었다.
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그나마 근대화를 위한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이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눈에는 단지 왕실을 위한 작업으로 비추었다.
일본·중국·러시아가 물고기(조선)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그런데 임오군란으로부터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오만해진 청나라는 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던 전통적 조공관계를 뒤집었다.그런데 그 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고.